정당공천제 폐지 반대론에 대한 반론
황주홍(강진군수)
기초자치단위 지방선거에서의 정당공천제도는 나쁜 제도다. 옳지 않기 때문에 그러하다.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모두 옳지 않다.
정치환경적 증거는 우선 두 가지다. 모든 국민여론조사에서 늘 70~80%대에 이르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응답이 확고부동한 첫번째 증거다. 다수(=50%+1인) 결정(=다수결)이 ‘정의 그 자체(by definition)’인 민주주의에서 절대다수의 뜻을 제압하고 거스를 수 있는 방식은 있을 수 없다. 이 나라가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한, 절대다수 국민여론이 지지하는 ‘기초공천제 즉각폐지’는 정치적 진리와 진실 그 자체다. 동시대의 정치적 진리와 진실에 상충하는 폐지반대론은 동시대적 설득력을 잃는다. 옳을 수 없기에다.
두번째 증거는, 기존 정당공천제의 배타적 수혜자인 국회의원들 스스로 없애야 한다고 자기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국회의원(정해걸 의원, 한나라당)은, “정당공천제는 국회의원들이 두고두고 자기들만 국회의원 해먹으려고 만든 못된 제도이기 때문에 기필코 폐지시켜야 한다”고 통렬한 ‘양심적 선언’을 하고 있고, 어떤 국회의원(이시종 의원, 민주당)은, “국회의원들이 정당공천제에 집착하는 근본 원인은 자치단체장과 기초의원들을 자기 수족처럼 두고 부려먹고 싶은 미련과 임명제 때의 향수 때문이다”고 강도높게 ‘신앙고백’하고 있다. 더 무슨 논거와 입증이 필요하랴. 지난 17대 국회 때 299명의 국회의원들 중 120명의 국회의원들이 기초선거 정당공천제 폐지발의안을 냈었다. 3분의 1 이상의 국회의원들이 폐지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번 18대 국회에서도 그 비율은 엇비슷할 걸로 판단된다. 오로지 ‘국회의원들의, 국회의원들에 의한, 국회의원들을 위한 제도’일 뿐인 정당공천제에 대해서 3분의 1 정도의 국회의원들이 자발적, 자각적으로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서는 이 상황이야말로 정당공천제의 정당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결정적 증거다.
Ⅰ. 그럼에도 불구하고, 3분의 2 안팎의 국회의원들은 요지부동적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집단적 사욕’에서 비롯된 정당공천제 지지론(또는 유지론)을 그럴듯하게 분식한다. 그렇지만 이들의 반대론은,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이들 스스로도 설득할 수 없을만큼 박약한 근거에 흔들리고 있다. 첫번째의 그럴듯한 폐지 반대론은, 민주주의는 (또는 민주주의의 근간은) 정당정치인데, 정당공천제는 그 정당정치의 핵심이라는 것, 따라서 정당공천제를 없애는 것은 민주주의의 골간을 부정하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1) 우선, 민주주의가 정당정치라는 주장 자체부터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는 얘기다. 역사적으로 민주주의(또는 민주제)는 정당없이 출발하였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경험에서 보는 것처럼, 민주주의는 정당과 정파를 초월해서 작용할 때 가장 이상형에 가까운 작동상태를 보여주었다. 로마공화정에 ‘군사력과 행운’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없었더라면, 공화정은 정파적 대립(귀족파:평민파)으로 훨씬 더 빨리 파산과 파국에 이르고 말았을 것이다. ‘초당적’이라는 말은 그때나 지금이나 더 우월적인 어감이자 더 바람직한 현상이다.
얼마전 농협법 개정안을 처리하는 국회 농수산식품위원회에서 정파의 ‘당론’없이 숙의한 결과 예상밖 만장일치로 갈 수 있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정당정치로 시종하는 국회에서도 ‘초당적’ 운영은 효율적일 뿐만아니라 국민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다.
게다가 20세기 들어 시민사회의 급속한 성숙과 성장에 따라 정당을 대체하는 기능과 역할체들이 활성화되면서 ‘정당(정치)의 위기’가 왔다. 우리나라에서도, 참여연대, 경실련, 환경운동연합, 여성유권자연맹, 희망제작소...등등의 수많은 공익적 시민사회단체들에 의해서 정당은 불신되거나, 제한되는 일이 일상적으로 빈번해질만큼 상대적 쇠락을 겪었다. 역사적으로도 동시대 현실적으로도 민주주의가 반드시 정당정치인 것만은 전혀 아니다.
(2) 또 하나는, 설사 ‘민주주의가 정당정치’라는 진술이 틀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풀뿌리 민주주의의 현장에서는 그 진술이 타당성을 잃는다. 기초자치 행정단위인 시·군·구에서의 시정·군정·구정은 행정의 영역이지 정치의 영역이 아니다. 필자의 경험이기도 한데, ‘강진 군정’이라고 할 때의 ‘군정(郡政)’은 ‘군 행정’이라는 뜻이지 ‘군 정치’라는 말이 아니다. 시정·군정·구정은 100% 비 정치적 영역(purely non-political sphere)이다. 강진 농협에서의 일을 상징적으로 ‘농정’이라 할 때 ‘농업 정치’가 아닌 ‘농업 행정(또는 경영)’을 뜻하는 것임과 같은 맥락이겠다. 강진 농협 행정이 정당정치의 절차이거나 소산물이어서는 안되는 것처럼, 강진 군정이 정당정치에 예속되거나 연루되어서는 안되는 거다. 강진 농협장 선거를 정당공천제로 치러선 안 된다는 것이 정치적 상식이라면, 강진 군수 선거 역시 마찬가지다.
풀뿌리 자치 민주주의의 정신은 자기 마을 일을 주민들이 논의의 주체, 실천의 주체가 되어 몸소 이룩해 나간다는 것이다. 농로포장을 어디서부터 할 것인지, 어느 마을의 회관을 먼저 지을 것인지, 학교급식에 제공할 식자재는 어느 농가(법인)로부터 제공받을 것인지, 다산초당 오르는 길을 어떻게 친환경적으로 재건할 것인지, 파프리카 생산시설 지원비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등등을 논의하는 것이 기초자치 행정 단위의 전형적인 활동상이다. 자치민주주의의 현장이 이처럼 철저히 비정치적 공간이기 때문에 정당정치적이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고, 그래서 정당정치적이어선 안되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대통령에 대해서도 ‘초당적’ 국정운영을 희망하고 요구해왔었다. 실제로도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은 당시의 집권당을 탈당해서 형식상 ‘무소속’이 되어 무당파, 무정파 대통령의 선례를 남겼다. 이렇듯 국민 여론은 대통령에 대해서조차도 ‘초당적’ 국정운영을 요구하고 관철시켜 왔었다. 국민정서와 정치사적 실정이 이렇거늘, 하물며 풀뿌리 기초 행정단위에서의 ‘초당적’ 시정·군정·구정 운영의 필요성은 두말의 나위가 없다.
(3) 그렇다면, 기초 지방자치 단위에서의 정당정치는 아예 불필요하고 불바람직스러운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강진군에서도 정당정치는 필요하고, 그것이 어느 정도 바람직한 것일 수 있다. 다만, 그 작동 방향과 체계가 새롭게 재인식되고, 재설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강진군에서의 정당정치는 강진군청과 관계되어선 안되고, 강진의 지구당(또는 당원들, 또는 당원협의회)과 연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국회⇄중앙당⇄도당⇄지구당⇄당원‘이라는 방향과 체계로 이루어져야 하고, 그렇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솔직히, 기존 정당들로서야 군청도 정당공천하고, 농협도 정당공천하고, 교육청도 정당공천하고, 대학 총장도 ‘국가백년지대계 차원’에서 정당공천하고 싶어하겠지만, 그럴 순 없는 것 아닌가? ‘강진지구당’과 ‘강진군청’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강진지구당이 위의 방향과 체계로 움직인다면, 강진군청은 의당 ‘중앙청 ⇄전남도청⇄강진군청⇄읍면사무소⇄군민’ 이라는 관계와 구도로 작동되어야 한다.
진실과 현실이 이러하기에, 국회 선거법 협상과정에서 국회의원들의 ‘집단이기주의’로 여야 담합하여 기초선거 정당공천제를 채택한 것은 참으로 ‘고약한 의도’이며 ‘거대한 국민 기만’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기초자치단위인 시·군·구에서의 정당정치가 한국 민주주의의 완성과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면, 군청과 군수를 끌어들이지 말고, 지구당 조직을 통해서 하면 된다. 군수와 군청은 ‘정당과 정치로부터 초연하고 독립된’ 행정기관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국회가 대법원의 ‘예하’ 기관이어선 안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거듭 설명하거니와, 굳이 말하자면, 강진군청은 이미 중앙청의 ‘예하 부대’이다.
Ⅱ. 두번째의 폐지 반대론은, 첫번째와 부분적으로 중첩되는 것인데, 기초공천제가 정당의 책임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이다.
(1) 우선 반문한다. 지금 여의도의 국회와 각 정당들이 책임정치를 구현하고 있다고 믿는가? 그렇게 믿는 국민들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 오히려 ‘무책임 정치’의 전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오늘 이 나라 정당정치의 현주소인 것은 아닐까. 오늘 중앙정치의 이 한심스러운 ‘무책임정치’가 각 정당들의 정파적 당리당략 때문이 아니던가. 필자는 개인적으로, 중앙정치권의 책임정치를 진정코 구현하려면, 사법부처럼, 한사람 한사람이 헌법기관이라는 국회의원들의 개인적 양심과 정치 철학에 따라 소신껏 의정활동에 임할 수 있도록 국회의원에 대한 정당공천제 마저 없애버려야 한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종종 고정관념때문에 새로운 실험정신의 점화를 기피한다. 국회의원에 대한 정당공천제를 충분히 실시해온 지금 이제 그 역기능과 폐해에 대한 국민적 논의에 착수할 필요성이 절실한 시점이 되어 있다고 보여지지 않는가. (*조금 전에 언급한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회의 ‘무당론’이 이끌어낸 ‘숙의끝의 만장일치’를 여기서 다시한번 상기해보자.)
(2) 지금 무책임정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국회의원들과 정당들이 책임정치 구현 차원에서 기초선거 정당공천제가 필요하다? 묻는다. 무슨 ‘책임’이라는 것인가? 민주당 소속 강진군수가 잘못되는 경우, 민주당 중앙당이 무슨 책임을 지겠다는 얘기인가? 한나라당 소속 경산시장의 시정운영에 한나라당이 무엇을 책임지겠다는 것인가?
도대체 시·군·구정 어디에 중앙당과 도당이 책임 맡아 거들고, 이끌어가야할 여지와 공간과 기능이 있기에 그런 말이 나올 수 있고, 성립가능하다는 말인가. 강진군정에 민주당이 책임지고, 경산시정에 한나라당이 책임진다는 허위의식이 자치현장에서 얼마나 실소를 자아내는 허언임을 이다지도 모르고 있단 말인가. (*무책임 정치밖에 모르는 중앙정치권이기 때문에 기초자치 행정 현장에서 책임정치를 시도하려 해선 안된다는 것만은 아니다. 기초자치 행정현장과 중앙당 정당정치는 질적으로 아예 다른 차원이기 때문에 이론상 그리고 현실상 함께 묶여 있어선 안된다는 것은 이미 앞(Ⅰ)에서 논의한 바 있다.) 무책임 정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중앙정치권으로부터 멀리 독립될수록 ‘책임행정’ 구현의 가능성은 높아지게 되어있는 것이 한국정치에서의 진실이다. 주민자치를 기반으로 하는 풀뿌리 생활정치가 ‘성실한 책임행정’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정파적인 정당정치의 무책임한 예속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 반대가 아니다.
Ⅲ. 폐지반대론자들은, 무소불위의 시장·군수·구청장들의 ‘황제’같은 전횡과 권력남용을 제어하기 위해서라도 정당공천제가 필수라 한다.
(1) 우선 그것이 사실에 부합한다면, 그렇다면 ‘황제’가 아닌 시의원·군의원·구의원 등 기초의원들에 대한 정당공천제만이라도 폐지하라고 먼저 요구하고 싶다. 단체장들을 황제라고 지적하며 우려하는 폐지반대론자들도 기초의원은 황제가 아니라고 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그쪽(=기초의원쪽)의 정당공천제라도 없애야 논리적 설득력과 일관성이 생기는 것 아니냔 말이다.
(2) 무엇보다도, 단체장들은 황제가 아니다. 강진군수는 강진군수지, 황제가 아니다. 단체장이 황제라면, 그 단체장들의 공천권을 흔들며, 쥐락펴락하는 국회의원들은 무엇일 것인가? 간혹 황제급인 단체장도 있을 것이다. 그런 국회의원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황제급인 단체장을 정당이 염려할 건 없다. 중앙부처가 있고, 감사원이 있고, 사법기관이 있고, 언론이 있고, 시민사회 단체의 서슬이 퍼렇고, 무엇보다도 선거와 유권자인 국민들이 있다. 이처럼 ‘황제권력’을 제어하고 감시할 기구와 제도와 체계가 즐비한데 하필 정당과 국회의원들에게 그 대역을 맡긴다는 논리는 너무 부자연스럽고 궁색하다. 많은 이들은, 고양이에게 생산가게를 맡기는 것보다 훨씬 더 부적절한 것이 단체장의 권력남용을 막기 위해 정당공천제가 필요하다는 강변이라고 느낄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엄연한 사실은, 정당이라는 조직이 권력남용과 횡포와 전횡을 막고 관찰하는 기구도 아니고, 그럴 자격도 능력도 기능도 없다는 것이다. 단체장들의 권력남용을 막기 위한 권한을 정당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은 그 권한을 공무원 노조에다 부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비현실적이고 비효과적이고, 훨씬 더 희화적이다.
Ⅳ. 폐지반대론자들은, 기존 정당공천제가 폐지되면 후보가 난립하고, 주민들의 선택과 선별이 더 힘들어지고, 여성이나 신인같은 정치적 ‘약자’의 진입과 당선이 더 어려워진다고 주장한다.
(1) 우선, 후보 난립은 걱정할 일이 아니다. 민주적 정치과정에서 걱정해야 할 일은, 정치 허무주의에서이건 정치불신에서이건, 후보가 없거나 너무 적은 게 문제이지, 많은 것이 문제될 일은 아니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그같은 인식이 더 민주주의적이라는 인식 말이다.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난립’이라는 부정적인 뜻을 담는 말 그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다수 후보’가 뭐 어떻다는 것인가.
실제 경험적으로도 후보는 난립하지 않는다. 기초 지방선거에서 정당공천제가 없거나 실시하지 않는 미국과 일본의 경우 후보가 전혀 난립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당공천제가 적용되지 않는 여타 선거를 보면 후보 숫자와 정당공천제와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음을 이내 알 수 있게 된다. 농협조합장, 축협조합장, 수협조합장, 대학총장, 문화원장, 교육위원, 교육감... 등의 선거 모두 정당공천제가 없지만, 후보는 ‘난립’하지 않고 있다.
(2) 정당공천이 없으면 정치적 관심이 없는 유권자들의 선택을 더 힘들게 할 뿐이라는 주장도 말이 안되기는 매양 한가지다.
요즘의 정당공천은 좋은 후보를 공천하지 않고, 덜 좋은 또는 더 나쁜 후보를 사사롭고 떳떳치 못한 이유와 배경 때문에 공천해버리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악화(惡貨)가 양화를 구축(驅逐)해버리는 일을 다른 곳이 아닌 정당들이 하고, 다른 사람이 아닌 그 지역구 국회의원이 하고 있는 것이 문제인 터에, 정당공천제가 좋은 후보를 선택하려는 유권자에게 순기능하고 있다는 주장은, 뭘 모르는 얘기이거나 번연히 알면서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을 기만하려는 매우 악의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어느 어느 정당 공천이라는 표기가 유권자의 선택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 역시 매우 오만한 정당중심적 사고가 아닐 수 없다. 정당표기가 되어있는 후보는 더 낫고, 정당표기가 없는 무소속의 후보는 더 열등하다는 사고방식이 깔려 있다는 거다. 나아가, 적어도, 중앙당의 정강정책을 보고 후보 선택을 해야 할 까닭도 필요도 없는 기초단위 선거에서의 정당공천 표기는 인물 됨됨이와 그(녀)의 지역정책 됨됨이를 보고 비교평가하고 선택해야할 유권자의 판단을 오히려 흐리게 하고, 결과적으로 후보들에 대한 공정한 접근과 평가에 선입관적 편향을 초래할 개연성이 없지 않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마땅하다.
(3) 정당공천제가 없으면 참신한 신인이나 여성같은 정치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진입과 당선이 어려워진다는 것 역시 억설일 뿐이다. 진실은 오히려 그 반대쪽에 있다. 기존의 정당공천제는 지역구 국회의원과 중앙당을 상대로 물량적인 과잉충성을 바칠만한 금전적·조직적 여력이 있는 정치적 강자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제도다. 역대 공천사례들이 증거하고 있는 바다. 정당공천제가 없다면 신인이나 여성들도 정당공천 핸디캡 없이, 똑같은 출발선상에서 비교적 공정한 선거 경쟁을 벌일 수 있게 될 것이다.
Ⅴ. 마지막 다섯번째 폐지반대론은, 정당공천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운영이 문제인 것이므로, 공천과정의 투명성을 높이고, 일당지배적 지역주의 문화를 개선시켜야 한다고, 그리고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정당공천제는 필요하고, 바람직하기까지 하다고 주장한다.
현실과 진실과는 거리가 먼 주장이다. 정당공천제가 즉각 폐지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은, 본질적으로 풀뿌리 지방자치의 현장에서의 정당지배랄까 정당정치라는 것이 필요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는 ‘불필요악’이기 때문이지, 왜곡되고 타락되어있는 그 운영과정 때문이 아니다. 물론 그 운영과정에 온갖 의혹과 유착과 비리와 부패가 극단적으로 만연해있기 때문에 정치적 ‘만악(萬惡)의 근원’처럼 인식되고 있고, 따라서 한국형 정치부패의 근절이라는 관점에서도 정당공천제는 폐지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그것이 폐지 주장의 본질일 수도, 전부일 수도 없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훨씬 더 중요한 이유와 까닭은, 기초 자치단위에서의 정당공천제는 자치의 정신과 원리와 불부합한다는 데 있다. 이미 위(Ⅰ)에서 설명한대로, 풀뿌리 자치행정은 정치와 정당에 예속되어서도, 정치와 정당에 포섭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며, 정치와 정당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자유독립적일수록 창의적이고 자생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영역인 것이다.
Ⅵ. ‘독도는 일본에 내줄 수 있어도 정당공천제만은 내놓을 수 없다’는 정도의 ‘숙연한 결의’를 가지고 정당공천제에 집착하는 다수의 국회의원들과 그들의 홍위병처럼 움직이는 직업적 정당인들은 정당공천제 폐지에 적극적인 정당 소속 단체장들이나 기초의원들에 대해서 ‘배신자’라고 매도하고 있다.
무엇에 대한 배신이라는 건지 잘 이해할 수 없다. 이 시대의 가장 추악한 악법인 정당공천제를 없애자는 것이, 그것도 절대다수 국민들의 뜻을 받들어, 자기 희생을 감수하며, 움직이고 있는 운동세력이 어떻게 배신자일 수 있다는 것인지 그들의 셈법과 논법을 잘 모르겠다. 절대다수 국민 여론을 좇고 따르는 것이 배신행위인지, 그 반대가 배신행위인지 묻고 싶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이자 넓은 의미의 친구였던 플라톤의 사상체계를 전복시키려 하면서 “우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리”라고 역설하였다. ‘한나라당이나 민주당보다 더 소중한 것은 조국’이라고 얘기해두고 싶다.
대한민국 (정치) 경쟁력 제고를 위해서 피할 수 없는 개혁과제가 바로 기초공천제 문제다. 그 어떤 명분과 논리와 포장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최후의 반민주 악법에 지나지 않는 정당공천제에 은신하고 기생하려는 것 자체가 떳떳치 못한 (정치) 시장질서 왜곡행위다. 시장에서의 특혜와 특권을 기대하고 도모하는 행위는 불공정거래행위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당공천제 폐지는 기성 정당들의 불공정성을 제거해준다는 차원에서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나 자유선진당 같은 정당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결국 진실과 진리야말로 모든 당사자들을 승복하게 하고 순결하게 하는 유일무이한 치유책이다. 역사의 교훈이었다.